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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임익준 첨사와 봉래(蓬萊)
의료 선교사 어얼빈
일제 강점기의 화가 서성찬
윌리엄 넬슨과 로버트 할리
교육자 김용근과 박진두
동화작가 박돈목
독립운동가 정인찬
선각자 박기종과 김치몽
육영사업가 안치운
수필가 김소운
임익준 첨사와 봉래(蓬萊)

영도는 육지와 가깝기는 했지만 섬이라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을 간파한 장군들에 의해 영도는 주변의 여러 진들을 통합하여 군사요충지인 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주둔지라고 해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척박한 환경으로 인한 궁핍함은 가난과 질병, 세금에 의해 더욱 가중되었다. 제도를 정비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백성들을 살기 좋게 만드는 일은 송덕비의 내용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절영도의 제3대 첨사. 봉래산의 명칭을 지은 첨사로 알려져 있다. 첨사로써 목마(牧馬)와 군마(軍馬)사무를 겸한 겸목관이기도 했다.
절영진 첨사로는 가장 오랫동안 부임하면서 일처리를 맡아 영도의 여러 지명을 확정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절영도를 재정비하고 관리하면서 여러 면에서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조세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호적을 정비하고 규휼에 힘써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영도 봉래동이 봉래산에서 기원했다 하는데 영도산에 봉래산 이름을 지은 이는 1883년 절영도첨사로 왔던 임익준 첨사이다. 그가 영도 내 각 지역의 이름이 없어 영도의 각 지역명을 일일이 지었다. 그는 영도 역사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승정원 일기 1884년(고종 21년) 4월 6일 기록에 경상감사와 경상좌수사는 영도첨사로 부임한 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도민들을 위해 산전(山田)을 개간하고 포구의 폐단을 바로잡고 자신의 녹봉을 출연해 도민들을 구휼하니 도민들이 그의 연임을 진정한 것인데 이 진정은 받아 들여진다.

승정원 일기는 임첨사의 노력으로 섬 주민 전체가 힘입어 살아나게 되고 군병들은 화락한 즐거움이 있고 주민들은 굶주릴 근심이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익준 첨사가 이름 없던 영도산을 신선의 산 봉래산으로 명명한 것은 난세인 구한말에 섬 영도라는 신선의 낙원으로 가꾸어 보려한 임첨사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첨사는 절영도진이 생긴 이래 만들어진 관료명칭으로 영도의 실질적인 행정개편에 대한 증거이며 본격적인 인구의 유입과 생활을 시작한 본격적인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지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해상의 요충지이자 근거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이와 같은 행정정비로 인해 마을이 안정되고 유지된 것이다. 임익준의 공덕비를 살펴보면 그가 영도에 큰 기여를 했다고 기록한다. 구체적으로는 돈을 내려 병든 이를 고쳐주었고, 곡식을 나누어 배고픈 이를 구휼했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문물을 정비하였다.

그로부터 영도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농토를 일구고 정비하여 일정한 소득을 산출시키고 이에 따른 바른 조세가 행해 진 것이다.
이런 재정적인 지원을 토대로 절영도 경제는 안정되었으며 유입되는 인구 역시 조금씩 늘게 된 것이다. 또 영도의 안정은 전체적으로 진을 통합한 부산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물자와 사람의 유입으로 인해 영도는 더욱 개발과 안정을 찾게 되었으며 진의 풍모도 갖추어갔다.

의료 선교사 어얼빈

영도에서 최초로 서양의술을 소개한 사람은 의료선교활동으로 부산에 왔다가 영도에 의원을 개설한 의사 어얼빈(Charles H.Irvin) 이었다 서양의술은 당시에 피폐한 국정을 감안할 때 민중의의료에 크게 공헌하였다. 개항은 긍정적인 문물만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낯선 여러 병원균의 도입도 초래하였다. 대표적으로 개항 3년 후에 일본에서 유입된 콜레라는 부산과 경남일대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서양의술의 도입과 병원의 설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현상인 셈이다.

1893년 의료선교사로 부산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영도교회 근처에 의원을 개설하고 1911년까지 의술을 통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어얼빈이었다. 그의 행적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면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도 적지 않다. 선교 및 의료활동을 하기 위해 낯선 이국땅을 선택한 용기와 결단이나 그동안 한방약제의 방식으로만 복용하였던 탕약을 간편한 형식으로 새롭게 만든 만병수(萬病水)는 우리나라에 크게 유행하여 여러 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그의 의술활동은 대중적으로 유명하여 서양 의술에 대한 관심과 견해를 갖게 하는데 이바지 하였고 여러 의사들이 영도에서 거주하게 된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문명은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인들의 탐험과 개척으로 원시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된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같이 들어온 병원균으로 인해 한 사회가 붕괴되기도 한 예가 있다. 우리도 1897년 일본을 통해 들어온 콜레라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도는 격리하고 치료하기 위한 섬이면서도 육지에 인접한 장점이 있는 곳으로 소독소 겸 전염병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의료선교활동을 통한 의술과 선교의 병행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기에 적당하다 . 종교적인 신념도 숭고할 뿐만아니라 의료행위가 지닌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서양청년의 봉사활동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새겨지게 된다. 더구나 미국인 의사는 한국인에게 대하여 대단히 호의적이다. 이런 관계는 발전되어 후에 초량교회 초대 목사로서 해방 후 군정시대에 부산시장을 역임한 양성봉씨의 누나인 양유식의 삶이 곁가지로 끼어든다.

부산 최초의 현대여성으로 알려진 양유식은 간호견습생에서 출발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운명을 맞이한 비운의 여성이다. 삼류소설의 전형적인 내용처럼 펼쳐지는 양유식의 삶은 어을빈과 약제사 고명우, 일본인 요시하시 등과의 로맨스와 이별로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스토리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화가 서성찬

서양화가로 활동한 예술인. 일제강점기의 미술가 그룹인 춘광회이해 부산작가들의 자생성을 목표로 부단하게 노력했던 부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비록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의 목표를 꽃을피우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을 기반으로 하여 현재 왕성한화단활동이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5년 영도에서 태어나 54살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영도에서활동하였던 서양화가이다. 그림과 인연이 먼 실업학교를 졸업하고어느 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카와바타 양화연구소에서 3년간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약관 25세로 제3회 부산미술전에서입선한 이래 10회에 걸쳐 입상한다. 기타 미술대회에서 여러 차례입상을 한다.

미술을 종교로 삼아 그 밖의 것은 곁눈질 하지 않고 산 정열적인화가였다. 일생 동안 단 한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영도대교 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부산의 미술사를 이야기하면서 서성찬을 누락시킬 수는 없다.

그에 의해 부산은 비로소 현대적인 관점의 미술을 갖게 된다. 특히 그의 정물화는 높이 평가받는데 이는 단순하게 정물만을 묘사하는 데에서 나아가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과 힘을 정물 속에 투영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때문이다.

서성찬은 “작업에만도 시간과 힘이 모자라는 내가 학교를 맡게되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많은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화실에서는 발견 못할 점을 나는 학생들에게서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쉬지고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고 말하곤 했다.

강점기에 예술인으로 산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단한 일이었다. 화단은 일정한 기풍을 지녀 사실 이런 기풍을 따르지 않으면 여전히 주류에서 밀려나 고전하기 쉽다. 이는 과거에는 더욱 흔하고 힘든 일이었다. 서성찬의 정물화는 그런 점에서 특이했다. 또한 개인전을 단 한차례만 열 정도로 가난하고 검소한 성품은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정물화에 매우 각별한 재능을 보였다. 전근대적인 기명절지의 가치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소화해낸 그의 정물화는 수준 높은 기량을 선보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가면과 안경, 각종 야채들이늘어져 있는 1956년 작 ‘가면 있는 정물'(부산시립미술관 소장)은 차분한 색감과 필선에 안정적인 구도로 일관하는 여느 정물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힘을 가진 작품이다.

새로운 가치를 통한 사물의 인식은 영도가 지닌 특성과 일맥상통한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리로 연결된 육지.
이런 독특한 지리적 환경과 풍광은 사물을 바라보는 눈조차 새롭게 만든 역동적인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서성찬은 외지인의 유입에 자극받아 김영교 등과 함께 ‘토벽’이라는 그룹을 창립한다. 그를 비롯한 다른 우수한 부산 화가들의 업적과 부산 미술 80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부산미술 80년, 부산의 작가들’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다.

윌리엄 넬슨과 로버트 할리

영도의 풍광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아름다운 풍경과 삶의 흔 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영도의 주거지역은 낯선 이방인에게도 호기심의 대상이다.
역사의 흔적이 묻어있고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부산과 부산에서 도 가장 아름다운 섬이었던 영도는 부산을 대표하 는 자원이면서 사랑받는 지역으로 자리매김 된다.

1883년 10월 부산포에 와서 미국에 있던 부인과 딸을 불러와 부 산거주 최초의 서양인 가족인 윌리엄 넬슨이나 로버트 할리는 모 두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반해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윌리엄 넬슨은 아름다운 부산과 영도에 반해 자신이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딸을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또한 미국태생(1961)의 국제 변호사이었던 로버트 할리가 1997년8 월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성과 이름을 하일로 하여 새로 만든 성씨이므로 사실상 하일이 시조가 되었다. 성씨를 하(河)로 정하게 된 것은 자신이 지난 92년부터 97년까지 살았던 영도구 청학동 때문”이라고 밝혔다. 바다로 둘러싸인 영도의 아름 다움에 흠뻑 빠져있던 그가 물 하 자를 성으로 선택한 것.

일 자 는 자신이 본관을 영도로 하는 영도 하씨의 시조로 가장 처음이라 는 숫자 1의 발음에서 따 왔다. 하일이란 이름은 자신의 미국 이 름이었던 로버트 할리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다.
“거(영도)서 오래 살면서 방송도 시작하고 여러모로 좋은 일 많았 지예. 다 봉래산 할매가 도와주시기에 그랬다 생각합니더” 라며 부산 사투리로 영도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영도는 부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며 “매일 봉래산 꼭대기 까지 운동 삼아 등산하면서 점점 영도의 경치에 빠져들었다”며 영 도를 그리워했다.

그는 귀화하고 나니 주위 분들이 더욱 좋아해주 는 느낌을 받아 항상 마음이 푸근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울 여 의도에 살고 있고 여전히 부산도 자주 온단다. 영도의 자연풍광이 가장 첫 번째 이유로 등장한다. 낯선 외국인 조차 부산과 영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은 매력적인 셈이다. 더구나 이 자연은 지역적인 정서를 그대로 전달하는 힘을 지녔다. 위의 언급된 것처럼 봉래산 할매가 자신을 도와주는 듯 했다는 말 에서 그들이 느낀 영도의 넉넉함과 지역민의 따스한 인심이 드러난다. 영도에 사람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연원이 그리 길지 않다 .

섬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그리고 본토가 지척에 있다는 지리적 이유로 인해 그렇다. 하지만 정착하기 시작하자 빠르게 인구가 늘고 토착화된다. 영도 가 지닌 힘은 낯선 이방인도 포용하는 넉넉한 인심과 정착을 도와 주고 이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초대 부산해관을 지낸 넬슨이나 하일 모두가 부산의 자연 풍광에 매료되고 주민들에게 이끌려 부산에서 정착하고 이름까지 개명한 인물들이다.

교육자 김용근과 박진두

근대기이래 영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후에 가장 큰 문 제도 대두된 일은 교육할 기관이 없어 학생들이 통통배를 타고 보 수동이나 송도 쪽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 문제였다. 위험한 통통 배를 타는 것도 문제였지만 새로운 근대정신과 사회적인 성취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하지만 이 를 담당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두 사람의 등장은 마른하늘의 단비와 같이 새로운 세계관을 열게 도와주었다. 김용근은 영도 최초의 신제학교인 옥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영도주민 2세들을 위하여 교육현장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개편 뒤 에도 힘을 모아 새 학교에 다니는 영도 2세들을 위한 후원자로서 계속 노력했다. 옥성학교가 강제접수 당한 뒤에도 사설학원을 설 립하였고 그의 자긍심과 향수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주체할 수 없 었을 만큼이나 강렬했던 것이다. 평생을 다하여 영도 2세 교육과 개발을 위하여 정열을 쏟았던 김용근이 영면하자 영도 사람들은 다 함께 그 죽음을 애도하며 영도지역 사회장(社會葬)을 배품으로 써 그 공로에 보답했다. 박진두는 영도구 동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동삼동 유지들 과 더불어 바로 동삼동에 초등교육시설 유치운동을 벌였다.

1939 년 목도공립보통학교 동삼동 분교의 설립을 보게 됐다. 이 동삼동 분교는 1942년 오늘의 동삼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곳으로 옮긴 뒤 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제도교육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동 삼동 거주 2세들에게도 교육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동삼동에 사설학원인 동삼학원을 열었다. 후세 교육을 위하여 평 생을 애쓰다가 나이 들어 타계 하자 동삼동 사람들은 그 공로를 기려 1990년 초에 박진두 공덕비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공덕 비를 세운다. 교육은 잠재적인 역량을 키우고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그야말 로 가장 중요한 문화사업 중의 하나이다.

비록 시작은 초등학교 교육에서 비롯되었으나 영도주민들은 누구보다도 숙명과도 같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육에 관심을 갖고 매진하였다. 선진문 물의 도입으로 새로운 사상을 보급하고,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인 재양성을 한다면 이는 식민지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훌륭한 인재를 만드는 전부인 셈이다. 비록 두 사람의 일대기를 통해 교육의 입 지를 다진 것이지만 현재 영도에는 이를 종자로 하여 국립대학교 를 비롯하여 각종 교육기관이 뿌리를 내리고 전국의 인재를 끌어 모으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부산에서 일어난 3.1 운동 당시 영도에서는 옥성학교를 중심으 로 모인 ‘절영도 소년단’에 의해 계획되고 시행되었다. 적어도 새 로운 가치를 가장 높이 들고 의지적 힘을 모으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확인된다. 이런 구국의 힘은 교육을 통한 새로운 문 물의 깨달음과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용근의 투철한 교육관이 없었다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교육이 지닌 가치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시대에 민족혼을 불어넣고 극복의 의지를 가르치는 일이었 던 것이다.

동화작가 박돈목

영도는 도시와 달리 때 묻지 않은 자연과 풍광을 갖고 있으며, 인정이 넘치고 변화가 적어 정서적인 안정과 위안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 영도에서 . 자라고 영도를 사랑한 문인들은 대부분 시나 동화에 영도에서의 체험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유독 문학에서 동요나 동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까닭도 영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영도구 동삼동 출신 인물로, 유명 동시집 [오동잎 우산], [살여 울에 송사리], [아름이와 나] 등이 있으며 남도여자중학교를 설립 한 4명 설립동인으로 후에 학교장을 역임하였다. 동시집인 [오동잎 우산]은 친근한 사물을 통해 잊기 쉬운 고향의 정취와 어린시절의 낭만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정감어린 단어와 친근하고 일상적인 내용을 결합시켰다. 또한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남도여자중학교를 설립한 동인으 로 활동하여 영도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문인협회, 영도문 인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닌 영도는 여러 곳에 빼어난 절경을 자 랑한다. 더구나 현대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금씩 남아있는 근 대화의 모습을 정비하면서 동심을 자극하는 내용을 더하면 관광상 품으로 기능하는 데에 부족하지 않다.

영도는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와 식수난등 으로 고생한 영도인들의 정서에는 친자연적이고 아픈 상처도 따뜻 하게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 등이 상대적으로 장점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정서적인 공감을 만들 수 있는 골목길이나 시장을 이용하 여 동시나 동화에서 구현하는 세계를 접하는 계기를 만드는 일이 기대된다.

독립운동가 정인찬

식민지의 억압은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과 국민들에게 깊은 상 처를 주었다 그리고 . 깊어진 상처만큼 새롭게 이를 극복하고자 하 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 작된 삼일만세운동은 영도에서도 외면당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시도로 행하여졌다. 영도지역의 3.1운동은 영도의 옥성학교 교사 정인찬의 지도를 받아 옥성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학교 뒤편 솔밭 사이에서 대한독 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시내를 행진하려다가 왜경에 검거되고 말 았다. 이로 말미암아 영도지역의 3.1운동은 확대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정인찬은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임시정부 경남간부 및 간 사정의 직책으로 안희재, 윤현태 등과 부산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김해․ 밀양 ․ 양산 일대에 걸쳐 독립자금과 군자금 모집에 종사 하다 일경에 검거되어(1929) 징역 2년을 언도받고 고된 옥고 후에 출감한 뒤 1932년 별세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은 급속하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 영도지역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여 활 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독립에 대한 염원과 과정은 우리에게 늘 혹독한 대가를 요구하 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의해 고문당하고 유린당했으며, 투옥 되어 모진 옥살이를 했다. 비록 영도에는 일제시대의 경찰서나 감 옥소는 없지만 이런 애국지사들의 활약이 있기에 현재의 영도와 주민들의 자긍심이 남아있는 셈이다.

역사를 복원하고 그 뜻을 기 리는 마음에서 지금은 사라진 옥성학교 뒤편의 솔밭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재연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정인찬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굳은 신념과 의지를 지 닌 인물로 실천적 행동가의 모범이 된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 은 현재에도 여전히 값지다.

바다로 둘러쌓인 영도를 배경으로 독 립운동을 진행하는 정인찬 선생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 마인 셈이다 . 비록 나서서 직접 행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굳 은 의지를 지닌 사람을 귀감으로 삼아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모습을 통해 역동적인 영도의 힘을 드러낼 수 있다.

선각자 박기종과 김치몽

문화는 생활과 직결되고 삶의 근간을 이루며 다양한 양태로 존 재한다 그렇기에 . 문화의 습합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대부분의 문 화나 문명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조화를 꾀하게 된다. 영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으로 여러 면에서 육지의 문화와는 차이 가 발생하였다. 결국 영도대교가 건립된 1931-34년 이후에 영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발전의 이면에는 숨은 공로자 가 있다.

박기종은 절영도진의 13대 첨사로 부임한 인물이다. 동래 기장 출신인 그는 1886년 부산항 정무관으로 임명되어 1894년 절영진 첨사를 겸직했다. 그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는 것을 일찍 깨닫고 유입에 적극 힘을 쏟았다. 갑오경장으로 구 식군제인 진영제(鎭營制)가 없어지고 절영도진이 붕괴되자 첨사에 서 물러나게 되었다. 김치몽은 정삼품 통정대부 당상관의 벼슬을 하다 통영으로 낙향에 있던 선생이 서양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에 입신한 후에 가 문의 박해를 피해 절영도에 와서 영도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새로운 문물이나 문명은 기존의 문화나 정신에 그대로 투영되거 나 반영되기보다는 지난한 시간을 거친 습합의 과정을 거치기 마 련이다. 그리고 이런 습합을 통해 현지의 처지에 맞고 어울리는 제도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개화기의 정신을 이어받아 유류 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화사상을 고취하려고 애를 쓴 인물이나 정삼품 벼슬을 털어버리고 절영도로 들어와 소수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종교적 신념은 비 슷한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박기종은 절영도의 지리적 장점과 활용도를 고려하여 신식 조선 소를 유치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미국계 스탠다드석유 대리점 을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유일한 교통수단인 도선의 연료사업을 통 해 일제에 의해 수탈되는 경제권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그는 30대에 부산 의 대갑부로 부상했다. 그는 일본과 무역할 수 있는 특허상인단체 인 ‘동래팔상회’에서 일하면서 일본어와 상술을 배워 치재를 할 수 있다. 1876년 대일수신사 일행의 역관으로 발탁되어 일본에 가서 제철소와 조선소, 해운업, 철도 등을 목도하고 신식산업의 필요성 을 인식했다. 그래서 일본의 교육기관보고 기술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깨달아 개 성학고(부산상고의 전신)을 설립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제에 재 산을 다 뺏기고 좌절과 실의 속에서 빈궁한 가운데 67세에 사망했 다. 박기종의 예는 민족경제의 성장과 그 좌절을 보여주는 전형적 인 예이다. 김치몽이 세운 영도교회는 영도 최초로, 이를 통해 신사상과 신교 육이 점차 부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그 뒤의 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새로운 가치의 유 입은 평등이나 계급적 신분제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 라는 것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육영사업가 안치운

영도에서 자수성가한 안치운은 피 땀흘려 일구어 낸 기업체로 많은 영도인들의 삶의 터전과 울타리, 그늘막을 만들어 주었다. 특 히 그는 기업을 자신의 검소함과 소박함으로 이룩해냈다. 안치운은 평생을 쉴 새 없이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일군 기업가 로서, ‘티끌모아 태산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일터에서 새벽별을 볼 때까지 열심히 일을 했으며, 목재제재 소를 운영하면서 기업을 키웠다. 직접 나무를 매어 나르는 한편 스스로 톱밥을 긁어모아 가마니에 담아 챙겨 조금씩 부를 키워나 갔다. 종업원들과 동고동락을 했고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 는 일이 다반사였고, 지게꾼이나 막일꾼과도 술잔을 함께 기울여 가며 기업을 일구었다. 이미 근대 초창기에 기업의 이윤은 사회 환원을 통해 기업은 개 인이 아닌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생각을 지닌 기업인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생각으로 회사를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을 내며,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민족기업인이 다른 지방보다 도리어 부산 에 더 많았다. 한일합방이 되기 직전 부산은 1908년의 전국 공장 92개 중 22개로 23.9%가 있었고, 1909년 공장 전체에서 공장수의 43.2%, 공장 생산 액의 47.2%를 부산공장이 차지했다. 이러한 공장은 거의 전부가 일본인의 투자였다.

그러나 1883년 부산인 최최의 회사로 보이는 ‘동계사’란 객주모임 이 시작되었고, 하단엄궁 지역의 객주들이 자신들의 영업권을 보 장받기 위하여 ‘하단엄궁상회사’를 조직했고, 이어서 부산항 객주 44명이 1889년 ‘부산객주상법회사’를 설립했으며, 1893년에는 하단 포객주조합인 ‘하단포상회사’가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부산일본인상업회의소’에 대응하여 부산상공인들 은 ‘조선상무소’를 독자적으로 결성해 1908년 ‘동래상업회의소’로 개편되었다. 부산상공인은 일본지역으로 진입하여 1876년 100여 호에 불과했던 일본인지구 초량의 한국인은 1905년에는 400여 호 약 2,000명으로 증가했다.

즉 1910년 한일합방 직전까지 한국과 일 본의 상공인들은 분리되어 있으면서 한국 상공인들은 일본인과 경 쟁하고 있었다.12) 안치운은 회갑연을 개최할 비용으로 장학회를 만들어 불우한 청 소년들에게 앞날을 열어주는 공익 기금의 종자돈으로 삼았다. 그 는 해방 직후 영선초등학교 설립추진에 애를 썼으며, 영도에 중고 등학교를 증설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교육을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수필가 김소운

수필의 달인이자 우리 시는 물론 민요․동요까지 일본어로 완벽 번역하여 민족 자긍심을 높인 김소운은 영도가 낳은 탁월한 문학 가이며 번역작가이다. 그가 남긴 번역작품은 일본인들에게 한국문 학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입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 학은 단순하게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과 정서를 통해 전달하는 힘을 지닌다.

따라서 단순한 역사적 인 유물이나 사실을 넘어서는 힘을 지닌다. 영국이 문화강대국으 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데에는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지 닌 작품과 힘이 큰 몫을 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어느 곳보다도 왕성한 영도에서 난 대표 작가 라는 점에서 우리의 문학적 우수성을 이웃 일본에 정확하고 아름 다운 문장으로 소개한 작가라는 점에서 다시금 조명해야 할 것이 다. 그리고 이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문화수출의 기본적인 구도와 같다는 점에서 선생의 안목을 엿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본명은 교환 또는 교중. 해방 이후 아호인 소운을 그대로 따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필명은 삼오당이다. 본명은 김교환이며 진해 웅천 출생이다. 영도에 처음으로 설립된 교회인 ‘제일영도교회’의 설립자인 김치몽의 자(子)이다.

그와 6촌지간인 김필환(85)씨의 말 에 의하면 17~18세경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일본에서도 수필 가로 유명하였다. 옥성학교 재학시절 ‘절영도소년단’이란 조직을 이끌고 3.1 만세운 동을 펼치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치조오 라쿠엥’이라는 시동인에 가입하여 일본시단에서 활동하였다. 시작활동과 더불어 번역에 힘을 기울여 ‘조선민요선(1943)’을 발표 한다. 이 번역 작품들은 일본에서 한국문학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 주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일본인들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된 장편수필 ‘목근통신’을 발표하여 일본 인들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각을 교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 였다 일본어사전 . 편찬 작업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일본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부족이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60년대에 귀국 한 뒤에는 배수지 옆 돌담집이 거처를 삼았다. 6—25 전후 부산 최 고참격 다방인 광복동 에덴다방을 비롯하여 금 강, 금잔디 등을 단골삼아 드나들면서 애국심을 강조하는 우국시 인으로서 역할을 자못 해냈다. 1952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세계예술인 대회에 한국대표로 다녀오 면서 일본까지 도착했으나 귀국이 허락되지 않아 일본에 망명하는 몸이 되었다. 그가 일본 도쿄에서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 때 이 승만 정권을 비판한 발언이 자유당 정부의 비위에 거스른 것이다.

일본의 ‘문예사전’에 등재될 만큼 저작 생활을 했지만 고국에 대한 애국열정은 남달랐다. 김소운은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집 필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부산을 자주 왕래했다. 그는 1981년 74 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자제 3명은 모두 운동권 출신이다. 큰 아들 김영은 서울대 출신이 며 김윤은 서강대 출신이다.

1998년 한국 무대에서 최초로 일본어 로 노래를 불러 화제를 모았던 사와 도모에(39)씨는 김소운의 외 손녀이다. 그의 문학비는 영도 해안에 세워져 있다. 문화수출은 현재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중의 하나로 손꼽히 고 있다 무엇보다 올바른 문학에 대한 인식은 타국의 문학을 이 해하고 평가하는 데 가장 기본이자 소중한 체험이다. 일본의 한국 에 대한 수탈은 다양한 방면에 걸쳐 전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가 장 큰 수탈은 정신적인 지배를 예속하기 위한 온갖 방법의 동원과 재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문학을 제대로 알리고 평가받기 위해 노력한 번역 작업은 소중하다. 아무리 우리 것이 좋다고 외치는 것보다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우수하고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해 준다면 부가가치 는 따라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통속적인 한류에 머무는 것이 아니 라 근본적인 문화의 우수성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려고 노력 한 선생의 업적은 찬란하다. 김소운은 한때 문교부의 문화국장으로서 임명될 뻔한 적도 있었 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피난 문인들의 안식처였던 광복동 ‘밀다원’에 출입하던 어느 작가가 김소운은 술만 취하면 팬티를 벗 는 습성이 있다는 모략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를 시기한 사람이 날조한 것이었다. “어디 이 김소운도 팬티 한번 벗어 보자. 그 모 략이 내 팬티를 벗긴다”고 허허 웃으며 팬티를 벗는 일도 있었다 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수십 년을 길러온 턱의 염소수염을 일시에 밀어 버린 사건도 있었다 . 동래고교의 교가를 작사한 기회에 학생들에 게 짤막한 연설을 하면서 그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여러분의 모 표는 벌떼이지만 나의 모표는 이 턱수염”이라고 익살을 부릴 만큼 수염을 아꼈다. 그가 얼마 뒤 그 유명한 턱수염을 말끔히 잘라 버렸다. 화가 친 구 김용준이 서울의 대로에서 미군 사병으로부터 그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려 조롱당했다는 얘기를 듣고부터 자신의 턱수염까지 잘 라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김 화백도 그 수모를 견디다 못해 수염 을 자른 뒤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동조 삭발이라 할 만 하다. 민족적 자존의 심경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셈이다. 아마 그 병사는 선비정신의 상징이기도 한 턱수염의 존엄성을 알 까닭이 없었다 하더라도 주둔군의 오만 방자성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10세적부터 방랑생활이 몸에 배인 터라 부산에서도 진해에 온전히 가족을 두고도 혼자 기거해 왔다.

그의 독거 생활에 관한 에피소 드도 있다. 본래 애견가였으므로 동네 구멍가게 주인의 개에게 그 구멍가게에서 산 카스텔라를 입에 넣어 주는 일을 날마다 되풀이 했다. 그러다 보니 개는 정작 주인보다 그를 더 따랐다고 한다. 그 처럼 개를 사랑하는 김소운이지만 술자리에서는 끝없이 자신의 체 험담을 늘어놓거나 어려운 시대에도 정부정책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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